이기희 칼럼 [같은 하늘 다른 세상]
Above the Stars by Anna Razumovskaya
혼자도, 같이 있어도 행복한
처음 가면 멀고 자주 가면 가까워진다. 근교에 있는 도시에 갈 일이 생겼는데 처음 갈 때는 아주 멀게 느껴졌는데 자주 가니 이웃 집처럼 가깝게 생각됐다. 사람도 자주 보면 가까워지고 안 보면 멀어진다. 사랑도 친구도 형제 자매도 안 보면 멀어진다. 안 보고 살 비비며 함께 살지 않으면 정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30년만에 고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파란 눈의 이웃보다 낯설었다. 단짝이던 친구도 반갑기는 한데 별로 나눌 얘기가 없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인사말 빼곤 짠하게 나눌 내용이 없어 우리의 대화는 허깨비 마냥 공중에서 맴돌았다. 다른 환경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시간들은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도 잊혀진다. 떠오르고 기억하는 것은 별똥별이 떨어질 때처럼 잠시 흔들릴 뿐, 먹고 사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추억은 무수히 빛나는 별자리로 반짝이지만 멀리 있다. 첫사랑의 연가는 쓸쓸한 저녁의 세레나데다.
사람은 같이 살아야 정든다. 작은 마찰이나 불화가 생기면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찿는다. 작은 틈새를 버려두면 겉잡을 수 없이 금이 간다. 도자기 구울 때 손이나 물레로 빚은 진흙 그릇은 가마에 넣기 전에 갈라진 곳이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실낱 같은 틈새도 가마에서 구워내면 금이 선연히 보인다.
연민도 상처도 사랑도 흔적으로 남는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가깝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거리는 필수적이다.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는 것이 최적인지, 의존 욕구와 독립 욕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가시털을 가진 고슴도치도 겨울에는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는다. 상대에게 찔려 상처 입은 고슴도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지만 추위는 다시금 서로에게 다가가게 만든다. 고슴도치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뒤로 물러서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추운 겨울을 견딘다. 고슴도치는 상처 주지 않고 추위를 피할 수 최적의 거리를 찿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와 나,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 상처 주지 않고 따스하게 껴안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거리가 필요할까. 나는 샤핑을 혼자 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 몸에 어울리는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서다. 이제 혼자서도 행복해지기로 다짐했다.
애들이 둥지를 떠나간 빈집에서 망부석처럼 누굴 기다리지 않겠다. 애들이 남긴 반찬이 아까워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먹는 그런 바보짓 하지 않을 테다. 대강 끼니만 때우는 그런 식사가 아니라 멋진 차이나에 오색 찬란한 요리 담아 혼자서도 행복하게 먹을 생각을 한다. 내 속에 있는, 힘들게 살아 온 나를 불러내 ‘수고 했어. 많이 힘들었지’라고 위로해 주리라. 너무 멀어서 외롭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그대와 나 사이에 작은 길을 내리라. 풀잎처럼 여리게 잡초처럼 모질게 꽃향기에 취해 살아온 어제를 쓰다듬고 사랑하리라.
혼자 있어도 행복하고 함께 있으면 더 행복해지는 날들 속에서, 비가 오면 빨간색 우산 쓰고 눈 내리는 날은 벙어리 장갑을 끼고 그대에게 다가가리다. 사랑이 결코 만남을 위한 약속이 아닌 것처럼, 헤어짐 또한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홀로 중얼거리며 둘이 하나 되는 꽃일 송별을 노래하리라.
미주 중앙일보 6.28.2021 (Q7 Fine Art 대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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